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범/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의 마찰 =====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와의 갈등도 이종범의 침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종범 본인이 밝혔듯, 호시노와의 마찰 때문에 외야수로 강제 전향당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듯하다.[* 이종범은 국내로 귀국하면서 "내 속이 홍어 속이요"라는 말을 남겼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시노는 이종범을 구타하고 방송에서 대놓고 이종범을 폄하하기도 했다. 국내 복귀 이후에도 이종범에게는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호시노를 만나는 꿈을 꿀 때마다 경기가 안 풀리는 징크스가 있기도 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790119|2003년]], [[http://m.sports.khan.co.kr/view.html?artid=201007082224463&code=51020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_share#c2b|2010년 관련 기사]] 이종범과 호시노가 마찰을 일으켰던 건 단순히 이종범의 성적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두 사람의 상성이 맞을 수가 없었던 게 주요 요인이다. 둘 다 야구에 관해서라면 한 고집 하는데다 야구관까지 서로 정반대인 탓에, 이종범이 호시노에게 숙이고 들어가거나 호시노가 이종범이 하고 싶어하는 야구를 하게 풀어줘야 문제가 해결될 텐데 둘 중 하나도 성립할 수가 없으니 잘 풀릴 리가 없었다. 이종범은 해태를 지휘하던 [[김응룡]] 감독의 자율야구 체제에 익숙했고 또 본인도 그런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러나 호시노 감독은 일본 야구계에서도 철권통치로 유명한 강성 관리야구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이런 타입의 감독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유형인데[* 호시노 감독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들도 많지만,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라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삼성에서의 투수코치 경력으로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오치아이 에이지]]가 호시노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예.] 이종범은 하필 불호에 해당했다. 실제로 [[김응룡]] 감독은 주니치에서 부진을 거듭하던 이종범에 대해 "저 녀석은 냅둬야 잘 하는데..."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특히 김응룡 감독은 이종범의 외야수 컨버전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종범의 장점과 기질을 모두 죽여버리는 판단으로 여겼던 것.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905290022699170|#]] 이후 유튜브 인터뷰에서도 팀내 고참이었으면서 코칭스태프였던 [[김성한]]과 [[김종모]]도 이종범은 신인시절 전반기에 터치를 하니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더니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일본 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지, 당시 일본 야구팬들도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의 호시노 감독이 있는 주니치보다는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퍼시픽리그]] 쪽으로 이적했다면 더욱 활약했지 않았겠냐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https://that3.5ch.net/test/read.cgi/meikyu/1069167504/l50|#]] 호시노가 이종범을 처음부터 탐탁잖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시노는 주니치 시절 이종범의 한국 시절 모습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중장거리 호타준족 성향, 그리고 근성있는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고,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이종범을 데려왔다. 게다가 이종범의 일본 데뷔 초에는 수비능력에 대해 혹평을 한 것도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수비 기본기를 커버하기 위해서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범위와 이를 이용해 타구를 포기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자세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99년에는 이종범이 부진한 성적을 기록해도 플래툰이나 교체요원으로 쓰지 않고 풀타임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고, 시즌 종료 후 한국에 가는 대신 가을 훈련을 하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수단 관리를 칼같이 하는 호시노 감독의 성향으로 볼 때 가을 훈련을 권유했다는 것은, 이종범이 단순히 성적 안 나오면 정리해버릴 용병이 아니라 어떻게든 키워내면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길 수 있을 만한 선수였다는 말이 된다. 즉 호시노는 '''이종범이 충분히 일본 프로야구에서 살아남을 자질이 있다'''고 봤던 것.[* 98시즌 부상 전까지의 맹활약도 있었고, 이미 부진을 극복해 내어 리그에서 손꼽히는 클로저가 된 [[선동열]]이라는 좋은 선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종범은 99년의 실망스러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로 가을 훈련을 거부하였다. 외국인 선수는 가을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계의 원칙이었으며, 당시 이종범의 부친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하기를 원했던 점 등, 이종범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내세울 만한 거절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뜻으로 훈련을 통해 문제점을 교정하고 일본야구에 적응시키려고 가을 훈련을 제안한 코칭 스탭이 이로 인해 불쾌해 했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은 이종범과 호시노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수 시절부터 배터리를 맞춰오던 [[나카오 다카요시]]를 감독이 되자마자 포지션 기용 문제로 다투다가 요미우리로 내쫓아버린 적이 있다.] 또한 호시노가 이종범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는 차별대우가 아니라 자신이 일본 선수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대우한 것[* 호시노의 야구관은 일단 못하는 놈은 '''닥치고 패고 보자'''다. 실제로 [[우노 마사루]], [[나카무라 타케시]], [[오치아이 에이지]], [[야마모토 마사]],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등 호시노 휘하에서 소속팀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들은 전부 호시노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으며 심지어 나카무라는 뼈가 부러졌을 정도다. 호시노는 감독 말년까지 선수들을 때렸는데, 말년에는 그나마 반성하고 선수들을 "남들이 안보는 곳으로 데려가서 때리는" 걸로 바꿨다. 안 때리는건 아니었다. 그나마 말년에 특별히 구타를 금하는 날은 선수 부인이나 부모가 직관 온 날 정도.]. 물론 구타를 한 게 올바른 코치로써의 방침인가에 대한 도덕적 이의제기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일본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했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반박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종범의 경우 국내 복귀 후에 본인이 타이거즈의 최고참이 되자 해태시절부터 내려온 구타문화를 없애버렸을 정도로 구타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호시노의 간섭과 구타는 그에게 역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일개 선후배 차원에서의 구타와 감독의 구타는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를 뿐더러, 특히 타국에서 건너온 용병임에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력도 호시노의 기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내야 수비의 안정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호시노의 스타일과는 달리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에는 실책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일본야구는 수비범위가 다소 좁아지더라도 정자세를 통한 안정적인 정면포구와 원바운드가 되더라도 정확하게 송구를 하는 기본기 위주의 수비를 상당히 중요하게 본다.[* 여기에 호시노 본인은 한 때 자신의 팀메이트였던 [[우노 마사루]]의 [[행복수비|지옥같은 수비]]를 직접 경험한 적이 많아서 이런 풍조를 더더욱 중요시 여겼다.] 거기다 당시 주니치는 투수친화적인 구장에서 스몰볼 위주의 야구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입장인데 상대 팀의 주자를 한 루 출루시키는 것이 승부와 직결되는 상황이 잦았던 만큼, 수비가 불안한 이종범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은 이러한 안정성 있는 수비를 해야한다는 일본야구의 풍조의 대척점에 있는 선수여서 더욱 평가가 박했다. 당시 이종범은 98시즌 중반까지 실책 11개를 기록했으며 4월엔 무려 6게임 연속 에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 수비 성적을 봤을 때 130경기로 환산하면 이종범은 이후 유격수 주전으로 활동한 [[쿠지 테루요시]]에 비해 10개의 자살, 75개의 보살을 더 많이 기록하고 18개의 실책을 더 기록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아무리 런세이브나 레인지팩터, 수비득점 등의 세이버 수비지표가 쿠지에 비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비에 아쉬운 부분이 없다고 하긴 힘들다. [[http://npbstats.com/players/db/%ED%83%80%EC%9E%90/?wdt_search=104614|#]] 특히 이종범이 쿠지에 비해 강점을 보인 세이버 스탯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평가가 더욱 나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비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유격수 자리에서 이종범의 가장 고질적인 유격수 수비의 문제점으로 여겨졌던 기본기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https://t.co/egmZG7w2Jx?amp=1|당시 일본에서의]][[https://youtu.be/2jmwiIWtFQU?t=278|수비장면]]을 보면 뚜렷하게 그 약점이 드러나는데, 좋지 못한 포구를 강한 어깨로 커버하는 방식의 수비였기에 안정성이 매우 떨어졌다.] 강제 외야수 전향은 어떻게 보면 이종범을 주전으로 쓰기 위한 주니치 코칭스탭의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이종범의 실책 수는 그 전 KBO 시절에도 상당한 수였고,[* KBO에서도 93,94,97년 20실책 이상을 3번이나 기록했으며 모두 야수 최다실책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일본 진출 바로 전 시즌인 97년에는 에러규정이 바뀌었음에도 27개의 에러(...)를 기록했었다. 하지만, 실책 수는 2루수와 3루수 위치는 물론, 외야까지 커버하는 넓은 수비 범위로 인해 늘어난 것으로 그 어떤 전문가도 수비가 약하다는 평가를 하지않는다.] 당시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수비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터 분석으로 소문난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종범의 데이터를 받은 후 리그 수준과 실책 수를 참고하지 않고 무작정 유격수에 박았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이미 시즌 초 부터 주니치는 [[후쿠도메 코스케]]가 올라올 때까지만 [[쿠지 테루요시]]와 이종범을 임시로 유격수로 돌려쓴 후 빠른 발과 어깨를 이용한 외야수로의 컨버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입단 초 국내 언론에 소개된 입단 기사에서도 호시노는 처음부터 이종범을 유격수로 쓰기보다 외야수로 전환시킬 생각이 컸었다.''' [[https://www.google.co.kr/amp/m.mk.co.kr/news/amp/headline/1997/80026%3fPageSpeed=off|#]][[http://m.munhwa.com/mnews/view.html?no=19971210509|##]] 본인도 허구연과의 인터뷰에서 후쿠도메가 입단이 확정된 후, 거물 신인이었던 후쿠도메를 키워줄 요량으로 구단에서 외야로 보냈다고 언급하였다. [[https://youtu.be/gEn6bzYIgC4?t=164|#]] 어찌되었건 결국 이종범은 유격수 수비에서 정면 타구와 송구의 정확도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팔꿈치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동년 [[한신 타이거스]]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수비형 [[유격수]] [[쿠지 테루요시]][* 현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코치. 199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참고로 일본 최초의 '''무홈런 [[야수]] 신인왕 수상자'''였다. 1997 시즌 종료 후 [[야노 아키히로]] 및 [[타이호 야스아키]]가 포함된 트레이드로 한신에서 이적했다.]한테 주전 유격수 자리를 내주게 된 후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쿠지의 경우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의 탈세 징계로 인한 시즌아웃으로 인해 내야수비자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주전 2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영입하였다. 다만 쿠지는 입단 첫 해엔 2루수뿐 아니라 이종범의 수비부진으로 인해 유격수로도 뛰었으며, 99년에 입단한 [[후쿠도메 코스케]] 또한 유격수 수비력에 문제를 보이자 이를 커버하기 위해 주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대수비요원 및 준 레귤러로 활약하였다. 2001년 [[이바타 히로카즈]]가 유격수에 완벽히 자리를 잡게 되자 쿠지의 자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백업 멤버를 거쳐 도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해서 은퇴했다.] 그러나 팀의 의도가 어떠했든 이종범에게는 이러한 포지션 전환이 자신의 야구관을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왔던 모양이고, 이종범 본인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 '외야수 전향 이후 내 야구가 바뀌었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상당히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감독과의 합이 맞지 않아 본인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나 그걸 극복해내는 것도 결국 본인 몫이므로, 이종범이 본인의 자존심을 꺾고 일본야구에 적응하려 노력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종범보다 먼저 주니치로 진출했던 [[선동열]]은 첫 해 2군에 떨어졌을 때에도 본인의 노력으로 결국 그 가치를 증명해 냈으며, 팀의 마무리로 2~3년 밥값을 했고 호시노 감독과의 사이도 좋았다. 선동열은 호시노가 작고할 때까지 스승으로 모셨고 자기가 못한 걸 어설프게 변명하지 말라고 이종범에게 한 소리한 적도 있다.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경우 역시 팀원들과 원만한 사이로 지냈고, 적응면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 첫 해는 선발 용병으로 데려갔으나 선발 첫 7경기 동안 방어율 6.28을 기록하면서 선발에서 강판되고 WAR 음수를 기록하는 등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이후 절치부심하여 1999년 불펜으로 전향한 후 95이닝동안 평균자책점 2.83을 기록하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